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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종자 자립 이끈 육종학의 아버지... '기술 독립'의 시대정신 배우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자 : 2019.08.09조회수 177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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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 자립 이끈 육종학의 아버지... '기술 독립'의 시대정신 배우다 우장춘 박사 서거 60주년 - 쉰둘에 조국 부름받고 日서 귀국 - 우리땅에 맞는 우량종 생산 몰두
오는 10일이면 우장춘 박사가 서거한 지 60주기가 된다. 그는 피폐했던 1950년대 우리나라 농업 부흥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수입에 의존했던 배추 무 등 채소 종자 국산화에 성공해 우리나라 육종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오늘날 농산물 자급 기반을 다졌다. 그 공로로 정부 문화포장을 받은 고인은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사흘 후 병상에서 숨졌다. 쉰둘 나이에 일본에서 귀국, 고인이 말년에 쏟은 학문적 열정은 오늘 우리 농촌을 지키는 종자 자립과 육종학 인재 양성의 초석이 됐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후학은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우 박사 서거 60주기 추모주간(5~11일)을 맞아 그의 생애와 애농정신을 되새겨본다.
■육종학 ‘뿌리’ 심어 이런 결실은 당시로는 육종학에 생소했던 국민의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후학의 학문적 의욕을 불러일으켰으며, 우리 농산물 자립화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 큰 힘이 됐다. ‘씨 없는 수박’과 관련된 오해도 육종학이 무엇인지 몰랐던 당시 시대상과 맞닿아 있다. 우 박사가 이 수박 재배에 처음 성공한 것은 1953년 동래 시험장에서였다. 그의 제자들은 이를 직접 목격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은 1943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기하라 히토시가 연구 개발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이를 재배에 성공한 것에 불과했다. 우 박사가 씨 없는 수박 최초 개발자로 잘못 알려진 것은 진도에서 애써 키워낸 채소 종자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면서다. ‘육종학이란 것은 종자 없는 수박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훌륭한 학문이다’고 선전하면서 대가인 우 박사를 앞세운 것이다. 1955년 7월 대구 ‘우장춘 박사 환영 겸 씨 없는 수박 시식회’에서 그가 이 수박을 보여주자 참석자의 입을 통해 와전됐다. 한국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를 둔 우 박사는 일본인과 결혼해 4녀2남의 자녀를 두고,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조국의 부름을 받아 부산 부두에 첫발을 내디뎠다. 부친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로 그가 다섯 살 때 자객에 의해 살해됐다. 이런 배경 탓에 우 박사의 귀국 동기에 대해 애국심, 아버지를 대신한 속죄의식, 차별로 인한 일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다. 책 발간에 참여한 시설원예연구소 유인호 연구관은 고인의 귀국 결심을 ‘사명감’으로 표현한 작가의 진단에 주목했다. 그는 “우장춘이라는 인물의 처지와 고뇌, 그리고 당시 시대 상황을 아우르는 적절한 표현으로 깊은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한편 우 박사 서거일을 맞아 9일 오전 10시 부산 동래구 우장춘기념관 앞뜰에서 부산시와 동래구, 부산과학기술협의회 공동주관으로 김석준 부산시교육감, 박무성 국제신문 사장, 전호환 부산대 총장, 김우룡 동래구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가 거행된다. 이선정 기자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800&key=20190809.22015003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