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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8월 10일]['씨앗의 독립선언' 우장춘박사] 오늘 제1회 부산시민 추모행사' 글 입니다.

[국제신문 8월 10일]['씨앗의 독립선언' 우장춘박사] 오늘 제1회 부산시민 추모행사

분류 : 공동체 명 부서명 : 부서 명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자 : 2006.08.11

조회수 6002

첨부파일 : No File!
['씨앗의 독립선언' 우장춘박사] 오늘 제1회 부산시민 추모행사
동래구 옛 원예시험장내 '우장춘기념관'서
 
  부산 동래구 온천동 우장춘기념관의 야외광장에 있는 우장춘 흉상을 어린이들이 보고 있다. 이곳에서 10일 제1회 우장춘 박사 부산시민 추모행사가 열린다. 김동하 기자 kimdh@kookje.co.kr
 
  
 창씨개명·일본국적 거부 1950년 귀국후 타계 때까지 9년간 우량종자 생산체계 확립 수입 의존 무·배추 국내 자급길 개척병 없는 감자 생산해 전쟁 이후 식량난 해결한 그는 종자 수입국을 수출국으로 탈바꿈시키고 척박했던 육종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우리 농업을 일으킨 과학자', '우리의 농촌을 풍요롭게 한 농학자'….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1898~1959) 박사를 수식하는 말이다. '씨 없는 수박'은 우 박사의 업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우 박사는 1950년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해 황폐화된 한국농업의 부흥을 위해 혼신을 다 바친 세계적인 육종학자이다.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했으며 우량 종자 생산체계를 확립해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종자의 국내 자급에 길을 열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우 박사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지난 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으면서 "아아, 조국은 끝내 나를 알아주었구나.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산의 위대한 과학자 우장춘 박사 서거 47주기를 맞아 10일 부산 동래구 옛 원예시험장 내 우장춘기념관에서 제1회 부산시민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번 행사는 부산시, 동래구청, 부산과학기술협의회가 주최한다. 참가 시민들은 누구나 헌화를 할 수 있으며 어린이들에게는 피튜니아 꽃씨를 제공한다. 오후 4시부터는 우장춘 박사 추모식이 진행된다.


▲일본에서 뛰어난 업적 = 우 박사는 1898년 4월 8일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훈련대 대대장이었던 아버지는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관련돼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일본으로 망명,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아버지 우범선은 우 박사가 4살 때 한국에서 파견된 자객에게 암살됐다. 이로 인해 우 박사는 1년 동안 고아원에 보내졌다가 히로시마현 구레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1916년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실과에 들어갔다.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우 박사는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으며 21년 소학교 교사인 일본인 스나가 고하루와 결혼했다. 우 박사는 농업시험장에서 1937년 퇴직할 때까지 육종학에 대한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1936년에 발표한 배추속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 논문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을 보충한 것으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우 박사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은 심했다. 당시 우 박사는 중국 면화시험장의 장장으로 거론됐지만 일본 외무성의 반대로 무산됐다. 농림성에서는 우 박사에게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국적을 취득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우 박사는 일본 농업시험장에 사표를 던지고 교토의 다키이 연구농장에 취업해 무 배추의 품종개량 연구를 했다.



 
  우장춘 박사
▲한국 농업 육성 = 1945년 해방이 되자 부산 동래뿐만 아니라 각계 인사들이 우 박사가 한국에 돌아오도록 '우 박사 환국추진운동'을 벌였다. 1950년 우 박사는 어머니와 아내,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둔 채 조국으로 돌아왔다. 우 박사는 59년 타계할 때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과학연구소장, 중앙원예기술원장, 원예시험장장을 역임했고 자신만의 육종지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우량종자의 생산체계를 확립해 나갔다. 전량 수입하던 무와 배추 종자의 국내 자급길을 열었으며 '무병 감자종자' 생산을 통해 6·25전쟁 후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근대농업을 개척한 우 박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과학상)'을 받았고, 1959년 건국 이래 두 번째로 대한민국문화포장을 수상했다. 우장춘 박사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1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에 안장됐다.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시설원예시험장 최영하 장장은 "우 박사님은 원예육종학 전문가를 육성하고 종자개량 및 육종연구를 담당할 원예시험장(현재의 원예연구소)의 창설과 정착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면서 "우리나라의 원예학과 민간육종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데 초석을 다지신 분"이라고 말했다.
 
임인재 기자 jae02@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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